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클렘페러 (문단 편집) === 독일 시절 === [[1885년]] 5월 14일 [[프로이센 왕국]] [[슐레지엔 주]]의 브레슬라우(오늘날의 폴란드 [[브로츠와프]])에 있는 [[유대인]]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. 4살 때에 [[함부르크]]로 이사를 갔고 5세 때 피아노 레슨을 하던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된 오토는 아버지 역시 아마추어 성악가였던 음악적인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전문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. 이후 함부르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오토는 1901년에 [[프랑크푸르트]] 고등 음악학교에 들어갔다가 [[베를린]]의 슈테른 음악원(오늘날의 베를린 예술대학교)로 가게 된다. [[1905년]]에 클렘페러는 베를린에서 당대 최고의 명지휘자였던 [[구스타프 말러]]를 만났고, 동년 11월 8일에는 말러가 참석한 가운데 베를린에서 오스카 프리트[* Oskar Fried, 1871~1941, 독일의 지휘자 겸 작곡가. 참고로 프리트는 1924년에 말러 교향곡 2번 전곡을 녹음함으로서 세계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라는 기록을 세웠다.]가 지휘하는 말러의 [[교향곡 제2번(말러)|교향곡 2번]] 연주회에서 무대 밖 밴드를 지휘했다. [[1906년]] 5월에는 베를린에서 전설적인 명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(Max Reinhardt, 1873~1943)가 연출한 [[지옥의 오르페]]에서 프리트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휘자로 공식적으로 데뷔한다. [[1907년]]에는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을 방문했을 때 말러의 교향곡 2번을 피아노로 편곡했으며, 말러가 이를 보고 감탄하며 클렘페러를 추천하는 추천서를 써준다. 같은 해에 클렘페러는 [[프라하]]의 도이치 가극장의 합창단 지휘자 겸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다. 이렇게 당대 최고의 지휘자의 인정을 받고 출세하게 된 클렘페러는 말러의 추천서를 평생 간직하게 되었다. [[1910년]]부터는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부지휘자를 맡았고, 그의 지휘 하에서 20세기 초반의 유명 [[소프라노]]들인 로테 레만(Lotte Lehmann, 1888~1976)과 엘리자베트 슈만[* Elisabeth Schumann, 1888~1952. 참고로 클렘페러는 그녀와 바람을 피우다가 이에 분노한 그녀의 남편이 공연 중에 클렘페러를 폭행하려고 하자 클렘페러는 연단에서 뛰어내려 맨주먹으로 그 남편을 공격했고, 이 소식은 해외에 보도되며 클렘페러느 단숨에 국제적인 유명인사(?)가 되었다.]가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되었다. [[1912년]]부터는 [[바렌]]에서 처음으로 수석 지휘자를 맡게 되고, 1914년부터 1916년까지는 슈테른 음악원에서 클렘페러의 은사였던 한스 피츠너[* Hans Pfitzner, 1869~1949, 독일의 작곡자 겸 지휘자. 말년에는 [[나치 독일]]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다가 나치에 협조한 것으로 간주되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나치당원이 아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.]의 대리로 [[알자스]]에 있는 슈트라스부르크 극장 감독을 겸했고, 1917년부터 1924년까지는 쾰른 가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. [[1924년]]에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[[안톤 브루크너]]의 [[교향곡 제8번(브루크너)|교향곡 8번]] 3악장만을 어쿠스틱으로 녹음하며 생애 첫 녹음을 했고, 같은 해에는 비스바덴 오페라 하우스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1927년까지 그곳에서 일했고, 1926년에는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가 되어 미국 데뷔를 하며 말러의 [[교향곡 제9번(말러)|교향곡 9번]]과 [[레오시 야나체크]]의 [[신포니에타]]를 미국 초연했다. 그리고 1927년부터는 새로운 작품과 혁신적인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 베를린 당국의 뜻에 따라 크롤 오페라 하우스의 초대 국장으로 10년 계약을 맺었다. 이곳에서 클렘페러는 [[아놀드 쇤베르크]], [[이고르 스트라빈스키]], [[파울 힌데미트]] 등 많은 현대 작곡가들의 최신 오페라들을 연주했으며, [[리하르트 바그너]]의 오페라를 연주할 시에 소위 '신바이로이트 양식'이라고 불리는 연출을 택하며 보수적인 [[바그네리안]]들의 항의도 받았다. [[1929년]]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의 [[런던]] 초연을 가지며 [[영국]]에서의 첫 연주회를 가졌는데, 비록 브루크너 8번의 런던 초연 당시 곡 자체의 반응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엇갈렸으나, 클렘페러의 지휘는 '[[BBC]]가 런던에 클렘페러를 장기간 동안 임명해야 한다'는 평까지 들었을 정도로 대호평을 받았다. 그러나 크롤 오페라는 [[1931년]] 7월 3일에 극장의 보수적인 경영진들이 클렘페러의 '전체적인 정치적, 예술적 방향'을 탐탁치 않아한다는 이유로 해체되었고, 이후 클렘페러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이직하여 활동했고, [[1933년]]에는 독일 문화에 공헌한 공로로 베를린에서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 [[바이마르 공화국]] 대통령으로부터 괴테 메달을 수여받았으나, 같은 해에 [[아돌프 히틀러]]가 집권하자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[[스위스]]로 이주했다. 이주 직전에 클렘페러는 [[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]]와 리허설을 하다가 지휘대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, '''이때부터 오토 클렘페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